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둑/한국의 역사 (문단 편집) == 1970~80년대 == 1970년 재단법인 한국기원이 출범했다. 1971년 신인 [[서봉수]] 二단(결승 진출 당시에는 初단)이 조남철 八단을 꺾고 명인전을 우승하는 대 이변이 벌어졌는데 이는 1세대 유학파 프로기사들의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. 이후 일본바둑에서 五단을 딴 [[조훈현]]의 귀국,[* 군복무 문제 때문이었다. 조훈현은 공군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.] [[정창현]], [[김희중(바둑)|김희중]] 등 신진급 기사들의 등장으로 한국바둑계는 몇 년간 춘추전국시대를 맞게 된다. 이는 조훈현이 한국 적응[* 한국어를 상당 부분 잊어버려 말을 다시 배워야 했다고.] 및 군복무 등으로 제 기량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했고, 서봉수 역시 명인전 우승 이후에는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가능했던 일종의 과도기였다. 1974년 한국바둑계 최대 사건인 '기계(棋界)파동'이 발생했다. 한국기원이 프로기사들의 권익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는 데 대해 불만을 키우던 중 소장파 기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기원 사무국과 충돌했고, 이 과정에서 기사들이 한국기원을 검찰에 고발하고 한국기원은 [[조남철]], [[윤기현]][* 1960년대 국수전을 2연패하는 등 정상급 기사로 활약했다. 2007년부터 억대 바둑판의 행방에 관련된 [[소송]]에 휘말려 큰 논란이 일었고 2009년 소송에서 패배하자 기사직을 사퇴.], [[김수영]][* [[김수장]] 九단의 형. 조남철 문하에서 바둑을 배운 제자로 바둑해설과 방송출연 등으로 일반인에게도 상당히 유명했다. 2005년 [[췌장암]]으로 별세.] [[홍종현]][* 서울대 법대 출신 프로기사로 알려졌다.], [[노영하]][* KBS의 바둑 해설을 오래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.] 등 5명을 주동자로 몰아 제명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만다. 당시 67명의 프로기사 중 조훈현, 서봉수를 포함하여 전체의 2/3을 넘는 46명은 한국기원을 탈퇴한 후 결집, '대한기원'을 창립하며 한국기원과 맞짱을 뜨게 된다. 두 기원은 기관지도 따로 발행하고 입단대회도 별도로 하는 등 극한 대립을 하였으나,[* 단 기전 출전은 함께 했다.] 2년 후인 1976년 전격적으로 재통합에 합의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. 이 사태를 계기로 프로기사들의 처우가 크게 향상되었고, 한국기원 내에서 기사들의 발언권이 막강해지게 되었으니 최종적으로는 프로기사들의 승리로 끝난 셈. 1976년 조훈현(당시 六단)이 [[하찬석]](당시 六단)을 꺾고 국수전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'조훈현-서봉수 시대'가 본격적으로 개막했고, 이는 198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. 이 과정에서 조훈현은 1980년(9개 대회), 1982년(10개 대회), 1986년(11개 대회) 3회에 걸쳐 모든 국내기전을 우승(전관왕)하는 위업을 달성하고, 서봉수는 그때마다 조훈현을 끌어내리고 천하의 형세를 양분하는 역할을 맡았다.[* 1980년에는 타이틀 판세를 5:4까지 만들기도 했다.] 당시에는 이들을 제외하면 우승은 커녕, 결승에 진출하는 선수 자체가 거의 없었고 그나마 기대를 모았던 도전5강([[강훈]], [[서능욱]], 김수장, [[장수영]], [[백성호]])은 끝까지 이들을 넘을 엄두도 내지 못하며 조훈현과의 치수고치기에서 두 점으로까지 떨어지는 굴욕을 당하는 등 번번이 --처발렸다-- 무너졌다. 그나마 가능성을 보였던 게 1980년대 중후반 등장하여 '신풍3강'이란 닉네임을 얻었던 세 명의 신인 - [[유창혁]], [[양재호]], [[조대현]] - 이었는데, 이들은 조훈현과의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호선과 정선을 넘나드는 싸움을 펼치며 주목을 받았다.[* 재미있게도 여기서 유창혁은 정선으로 두어 모두 승리, 양재호는 호선으로 두어 모두 패배했다.] 이들 중 유창혁과 양재호는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정상급 기사로 성장하게 된다.[* 조대현은 평범한 기사로 남았다. 양재호가 1994년, 유창혁이 1996년에 九단으로 승단한데 비해 이들보다 늦은 1999년에 九단으로 승단했다. 유창혁이 통산 다승 4위(1,365승), 양재호가 975승인 반면 조대현은 통산 575승으로 이들에 비하면 부족한 성적이다.] 1982년 조훈현이 한국 최초의 九단이 되었다. 여기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,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이 최초의 九단이 되지 못했던 것. 이는 사실 조남철의 주도로 만들어진 승단대회의 --거지같이 어려운-- 시스템에 조남철 자신이 번번이 발목을 잡혔기 때문이다. 1980년대쯤 되면 조남철은 정상권에서 완전히 밀려나 있었고, 자신도 바둑 보급에 힘쓰느라 승단대회에 집중하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다.[* 그래서 한국은 九단의 숫자는 가장 적었지만 그 만큼 권위는 상당히 컸다. 이 흐름은 [[유창혁]]과 [[이창호]]가 1996년 여름에 九단으로 특별승단이 이뤄지고, 2003년을 끝으로 승단대회가 폐지되면서 바뀌게 된다.] 결국 1983년 김인이 승단대회를 통해 두 번째로 九단이 된 이후, 바둑계는 부랴부랴 최고 원로였던 조남철을 九단으로 '추대'하며 한국에서 3번째 九단이 되었다. 이 시기까지 한국바둑은 세계에서는 듣보잡 신세를 면치 못했다. --어차피 바둑 많이 두는 동네가 한중일 삼국밖에 없긴 하지만-- 당대 최강의 바둑은 일본이었으며, 2인자 격은 중국이었다. 중국과 일본은 한국을 배제하고 '중일 슈퍼대항전'이라는 국가대항전을 치르는 등 한국바둑을 철저히 무시했고, 1988년 최초의 세계기전인 [[응씨배]]가 출범[* 사실 최초로 개최되어 결승까지 치른 대회는 후지쯔배였으나, 이 대회는 당시에는 응씨배가 출범하는 것을 보고 일본이 최초 세계대회라는 명예를 양보하기 싫어서 급조한 대회였다. 물론 이후에 성공적으로 정착해서 권위 있는 세계대회의 하나가 되긴 했다. 2013년 현재는 폐지됐다.]할 때도 한국 기사는 단 한 명(조훈현)밖에 초청받지 못할 정도였다.[* 심지어 미국과 호주 대표도 한 명씩 있었다. 게다가 대만 대표는 3명. 이것은 잉창치씨가 대만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국 바둑의 당시 위상을 잘 나타낸다.][* 이 때 한국기원은 이런 사태를 항의했으나, 주최 측은 [[일본기원]] 소속인 [[조치훈]]의 국적이 한국이니 사실상 한국 대표가 2명이라는 궤변을 하며 한국기원을 달랬다. 또한 [[조훈현]]을 출전 선수로 선발하고, 예비 1번을 [[서봉수]]를 주었는데 응씨배가 최초의 세계기전이라는 점, 그리고 당시가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조훈현이 이를 포기할 리가 없었다.] '''그리고 바로 그 1회 응씨배에서 조훈현은 우승을 차지했고, 세계바둑의 판도는 바뀌기 시작했다.'''[* 그래서 응씨배 2회는 출전 기사의 숫자가 늘었다.] 결국 1980년대에는 국내파 서봉수와 유학파 조훈현 간의 치열한 승부기질과 천부적 재능 간의 정반합(正反合)적인 일대 투쟁의 효과로 한국 바둑은 알게 모르게 일본 바둑을 바짝 추격하게 된다. 적어도 수뇌급인 [[조서]] 둘은 이미 일본 초일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.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미처 그걸 인지하지 못했을 뿐. 그리고 마침내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으로 '한국기원도 할 수 있다!' 라는 것을 보여주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